약삭빠른 후배 시리즈 - 이로하"초코? 뭘 기대하는거에요, 기분 나빠요"
요즘엔 방과후 데이트라는듯이 공원에 들르는게 나와 잇시키 이로하의 일과가 됐다. 깊게 쌓이는 눈이 주택가의 간소한 공원에 쌓여서 하얀 융단을 연출하고 있다. 우산 하나로 걷고 있으니 둘만의 세계가 완성된 기분이다.
"……후힛"
갑자기 이로하가 웃음을 흘린다.
"뭘 웃는거야. 그거냐, 젓가락이 떨어져도 웃는 나이냐"
"젓가락이 떨어진 정도로 웃을리가 없잖아요, 하치군은 바보에요? 바보군요"
관용구를 말할 생각이었지만, 하타 유쿠처럼 내 개성을 일도양단 당했다. 유감!
"행복을 만끽한거라구요……"
연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는 이로하. 방금전의 말이 나에게 향한것이며,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쳤다는걸까.
"이로하……"
"엥, 왜 그렇게 신혼 이틀째 저녁이 맛있었다같은 얼굴을 하는거에요. 저는 요즘 친구랑 잘 되서 행복하네에 라고 말한거라구요. 미안해요 기분 나빠요"
이 대화에도 꽤나 익숙해졌다(나날로 이로하의 단어집이 늘어나는건 별개로 하고).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는거너 아니라서 나는 무거워진 어깨를 추욱 떨군다.
어깨를 떨구자 동시에 우산이 내려가서 시야가 가로막혔다.
그 순간――,
"……음"
이로하의 입술이 살포시 내 입술에 닿는다. 추위로 딱딱해져 있고, 서로의 숨결이 그걸 조금 풀었다.
"이로하, 조금 추우니까 껴안아도 돼?"
"………본의아니지만 학생회장으로서 내버려둘 수 없네요"
라며 이로하는 내 상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슴에 대고,
"하아-, 역시 얇은 옷이 더 따뜻하네요-"
행복하듯 한숨을 쉬는 이로하에 비해 내 얼굴은 차갑다. 상의 단추를 푼 탓에 틈새 바람이 차갑다. ……왠지 치사해.
"저기 하치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좋아해"
"하윽"
아무래도 희망하는 대답이라는 달랐던 모양이라 깨무는 행동을 했다. ……약삭귀엽다.
"그럼 뭐야. 말해봐"
"……하치군은 발렌타인 초콜렛을 받을 가능성은 1%정도는 있어요?"
아무래도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닌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에 사건이 일어날때, 정신적으로 곤란해졌을때와 같았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떤걸 대답하면 정답인지 잘 모른다.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여친 말고 초콜렛을 받지 않는다고 대답하는게 정답으로 생각이 들지만…….
"미안, 나는 매년 러브러브 초콜렛을 받고 있어"
"코마치 몫은 빼주세요"
……이건 진짜 뭔가 있다. 평소라면 "동생이 주는 몫을 계산하다니 기분 나빠요"라는 내용을 백배 정도는 날카롭게 말했을텐데.
한번 더 생각을 정리하도록 힘쓴다. 갑자기 떠오른 발렌타인 화제, 기운이 없는 이로하. 농담이 통하지 않는 상황. 이것들로부터 도출되는 대답은…………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봉사부의 녀석들이라면 만들어줄지도 모르고, 반대로 우리에게 신경을 써서 만들지 않을지도 몰라. 그 이외는……뭐어 하루노 씨라면 가능성은 있을지도"
실수로도 받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려다 그만둔다. 어디에 도청기가 달려있을지 모르니까.
"……반드시 받아주세요"
"엑……"
이로하는 내 가슴에 한번 더 얼굴을 묻고, 그리고――,
"올해는 초콜렛, 건낼수 없을것 같으니까요"
라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니 눈은 멎었고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
다음날, 내 이변을 가장 먼저 깨달은건 의외로 토베 카케루였다.
"얼레, 타니 왠지 기운 없지 않지 않아?"
없지 않지 않아라니 왠지 울것 같은 나를 달래는것 같아서 울것 같다. 없지 않지 않아 울지 울고 울어 우네. 자, 나는 없다를 몇 번 말했을까요. 그보다 타니는 뭐야? 혹시 다니의 진화형? 새로운 괴롭히기?
"아니, 딱히……"
"아니아니아니, 절대로 기운 없대도!"
주절충 특유의 스스로 꺼낸 소재를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정신이 토베에게 끈질김을 낳게 했다. 솔직히 짜증난다. 하지만 이 녀석의 경우에는 다정함에서 오니까 막대할 수도 없다,
"요즘 잇시키에게 변한 구석 없어?"
라고 일단 물어본다. 물론 포즈로 토베는 이로하가 뭔가를 상담할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타니는 못 들었나……"
지인의 짜증나게 돌려말하기 랭킹 3위 정도는 들어갈 "너는 몰랐나" 라는 소리를 하는 토베에게 때릴뻔하면서도 어떻게든 짜증을 참는다.
"못 들었냐니 뭘?"
"아니, 이로하스 녀석 말야, 얼마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함께 있었던 타교의 학생회장이 들붙어서 말하는것 같았어. 되게 고민했다구?"
청천벽력, 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지만, 나에게는 번개에 맞은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거의 매일 함께 돌아가고 있는 여친에게 어떻게 다가붙을 틈이 있었다는건가.
"뭐, 이로하스는 타니 외곬이니까 신경쓸 필요없지만"
하하하, 라며 크게 웃는 토베. 그 경쾌함이 지금은 조금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떙큐 토베.
◆◆◆
점심시간.
마음속이 평온하지 않는 나하고는 대조적으로 봉사부의 분위기는 차분해져 있었다. 아니 다른 의미로 소란스러웠다.
"히키가야, 야채도 안 먹으면 안 클거야"
라며 유키노시타가 책상 위에 펼친 도시락에서 아스바라 베이컨을 젓가락으로 집에 내 입에 넣으려고 한다.
"자, 잠깐만 유키농! 힛키는 이로하의 남친이야!!"
나이스 유이가하마. 너에게도 남들 수준의 정조관념이 있었구나. 순전히 입으로 옮기기 달인이라고 생각했어.
"무슨 소리를 하는거니, 유이가하마"
아, 이거 알고 있어. 유키농이 가하마 씨를 회유하는 패턴이다.
"확실히 그하고 잇시키는 사귀고 있어. 서로 사랑하는 러브러브쪽쪽이야. 매일 방과후 데이트하고는 키스를 하고 있고, 주로 가는 공원에선 리얼충을 사양하는 간판이 걸려있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맹목 이야"
엑, 왜 아는거야. 그보다 그런거 걸려있었어!?
"거기다 말하자면 장래를 맹세하고는 '우리는 아직 학생인데 바보같네'라던가 수줍은듯이 말하는 귀여운 커플이기도 해"
"유키농……안정된 스토커구나"
"하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연인. 즉 타인이야. 피가 이어진것도 아니거니와 법적으로 관계가 있는 두 사람도 아니야. 사랑을 말하기만 할 뿐인 아무 관계 없는 두 사람이야"
"화, 확실히!!"
라고 세게 끄덕이는 유이가하마. 바보는 귀엽다는건 이런걸 말하는걸까.
"그에비해 우리는 봉사부라는 서류상 연결이 있어. 즉 우리가 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거야, 유이가하마"
사르륵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는 몸짓은 샴푸CM에 나올정도로 예뻤지만, 말하는 내용은 자이언 수준으로 엉터리다. 이 녀석, 의외로 신흥종교의 교주같은거 할 수 있는거 아냐?
"………"
충격적인 사실에 유이가하마는 놀란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했지만 입가에 손등을 대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때는 대개 시답잖은 상상을 할 때였다.
"그렇다는건 내가 유키농보다 훨씬 힛키랑 관계가 깊네!?"
그 순간, 유키노시타의 등에 번개가 내리친듯한(것처럼 보일 정도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그걸 깨닫다니, 성장했구나 유이가하마"
에헤헤, 라며 웃는 유이가하마와 숙적의 성장을 기뻐하는 유키노시타.
(아니, 평범하게 너네야말로 단순한 남이거든)
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소리로 내지 않았떤건 내 안에서도 유키노시타도 유이가하마도 '남으로 삼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던 것이다. 대신 한숨을 내쉬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걸 전하기로 한다.
"둘 다 고마워"
"……엣?"
"……머리라도 맞았니?"
수상쩍은 시선을 보내는 둘. 나는 눈물을 참으면서,
"아니, 음……너희도 알고 있잖아? 잇시키가 저쪽 학생회장이 들러붙는거"
두 사람은 놀라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유이가하마가 입을 연다.
"응, 미안해 입다물고 있어서. 이로하한테 조용히 있으라고 들었거든"
"아아, 알어"
그러자 유키노시타가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잇시키는 솔직히 우리도 대처하기 곤란한 사안이야"
유키노시타가 그렇게까지 말하는건 상당히 드물다. 평소라면 허세라도 똑바로 할 수 있나 없나를 말할텐데…….
"왜냐면 저쪽 학생회장,
――얘기가 통하지 않잖아?"
일찍이, 이렇게까지 한 마디로 상황을 설명해온 사안이 있던걸까.
우리는 잠시 얼굴을 마주본채로 침묵이 흐르고, 그리고 동시에,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드래퀘1을 할때 늘 생각했다.
――왜 저렇게 보이는 위치에 성이 있는데, 서로 공격하지 않는걸까.
그건 많은 아이들의 공통인식이었떤 모양이라,
"안녕, 음……네 이름은……그게…"
"히키가야다"
"그래! 히키가야! 오래간만이네, 히키가야. 크리스마스때는 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
타마나와는 입을 열자마자 나를 평가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나는 너 같은것의 이름 기억 못하는 타교의 학생까지 제대로 평가하고 있어" 발언은 솔직히 짜증만 인다. 물론 자신의 여친에게 참견을 해대는 짜증남이라는 색안경이 있다는것도 가미하고 있다.
하지만 타교의 학생회장이 단 혼자서, 그것도 연애사건으로 방문한것은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나였다면 아마 무리일것이다. 학교에 체제를 생각해 또 이로하의 입장을 생각하면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런 의미로는 이 남자는 진심인걸지도 모른다. ……나보다도.
"그래서 무슨 일이야. 일부러 교문까지 나를 불러내서"
점심시간, 굳게 닫혀진 문을 사이두고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타마나와는 여유로운 얼굴을 들고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했다.
"내가 너를 불러내? 하핫, 너는 의외로 자신만만했구나!"
그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한다. 동시에 타마나와고 깨달았는지 조금 기분나쁜 얼굴로,
"아니면 메세지 전언을 부탁한 그가, 쓸데없는 쓸데없는 짓을 해준건가?"
라고 말했다. 메시지 전언은 같이가 아니었나? 라는 오랜만에 정신적인 대미지를 입으면서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대충 같았다. 그리고 그건 맞았다. 토베가, 나에게 배려해서 이로하보다도 먼저 전했던 것이다. 라인 메시지에,
토베:가세는 언제든지 할게!
라고 했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란 이걸 말하는게 아닐까.
타마나와는 짐즛 크게 한숨을 쉬고 나를 향해 담담하게 말한다.
"뭐 됐어. 조만간 넌하고도 얘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어"
"하아, 나는 그런 일 없는데"
"그렇겠지. 너는 잇시키랑 사귀는 기적을 완고하고 옹고집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될테니깍,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새장에 박히고 싶다고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야"
웅변이었다.
크리스마스때도 주절주절 의미모를 단어를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의견을 손바닥 위에 두고 억지로 연호했기 때문이며, 본래의 타마나와는 무의미하게 카타카나 영어를 말하지도 않는다, 좀 더 솔직한 놈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네 망상에 어울릴 겨를은 없어. 나는 점심시간이 끝나버리니까"
라기보다,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악령퇴산 도만세만 구후후후후……아니 왜 에비나의 생령이 빙의됐어!?
"흐-응, 도망치는구나"
"……뭐든 말해. 나는 이기지 못하는 싸움은 하지만, 뻔하게 이기는 싸움은 안 해"
"그 증거는?"
"피곤할 뿐이잖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말투가,
단어 선택이,
표정이,
움직임이,
타마나와에게 분노를 갖고 있었다는걸.
"오늘은 이걸로 돌아갈게, 히키가야"
타마나와는 여유를 듬뿍 담은 미소를 보이고, 그리고,
"잇시키에게 전해주지 않겠어? '발렌타인 데이 기대하고 있을게'라고"
높게 올려진 선전포고는 히키가야의 마음에 크게 꽂혔던 것이었다.
◆◆◆
그리고, 타마나와의 전략은 뜻밖인 부분까지 미쳐있었다는걸 안다.
"미안하다, 귀중한 쉬는시간에 불러서 말이다"
점심시간 잔여 시간, 빈 교실로 끌려온 나는 히라츠카 시즈카와 단 둘이라는 묘하게 흥분되는 시츄에이션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이, 이로하, 나는 너 외곬수다(거둥수상).
"아뇨, 잘못한건 저니까요"
실제로 토베에게 들었다고 외부 인간과 접촉하는건 잘못됐다. 설령 그것이 아는 인간이든, 학교에는 학생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학생은 규칙을 준수할 책무가 있다. 그걸 깬건 다름아닌 나다.
"그렇군. 하지만 네가 규칙이나 교칙운운을 한다면 그건 아니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담배를 빨고 잠시 망설인다. 그야 빈 교실이라고는 해도 교실이다. 여러모로 안 되겠지.
"내가 너를 불러낸건 오히려 그 전의 이야기다"
"전……?"
떠오르는건 수업 시간에 졸았다는 정도지만, 그런걸로 불러낼리가 없다. 그렇다는건,
"잇시키와 사귀고 있다는것……말입니까?"
꿈틀, 눈썹을 움직인다.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다.
"아니, 먼저 말해두겠지만 부러워서 물렀다는건 아니다, 음"
당황하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보고 당황하는 나. 마이너스의 연쇄다.
"……네가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건 그녀가 학생회장이 되고나서라는 모양이군"
아아, 그런건가.
"네, 정말 최근이에요"
"그렇다면――"
"나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말을 끊듯이 큰 목소리로,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구요"
라고 대답했다.
"그런가……"
히라츠카 선생님은 납득한건지 작게 끄덕였다.
"뭐, 교사로서 체재를 빼면 유감이었구나"
뭣하면 내가 초콜렛 만들어줄까? 히라츠카 선생님이 그런 위험한 농담을 해서 나는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엥, 무슨 의미인가요?"
"아, 아니, 아니다! 이건 프로포즈라는 의미가 아냐! 단연코 아니다! 더군다나 나를 초콜렛 코팅해서 먹.어.줘(하트)라고 생각 안 했거든!"
상상했더니 의외로 잘 먹힐 발언을 하는 히라츠카 선생님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아라사의 망언에 어울릴 겨를은 없다.
"그 전에, 뭐가 유감이었다는건가요……?"
확실히 이로하가 나에게 초콜렛은 만들 수 없다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걸 히라츠카 선생님이 알고 있는건 의미를 모르겠다. 일부러 그런 말을 하긴가?
"아아, 그 쪽인가. 그치만 그렇잖아?
그 날은, 크리스마스 파티와 함께 카이힌의 학생회랑 자원봉사로 자선 행사를 하니까"
추욱.
납득이 갔다. 아니, 바닥에 떨어졌다.
이로하의 말, 타마나와의 말, 그 두 점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순간.
그녀가 감춘 분노나 슬픔, 타마나와와 함께 보내는데 대한 질투, 무엇보다 자신이 그런걸로 충격을 받을 만큼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번에 마음에서 흘러나와 사고가 정체해버린다.
"몰랐나……"
마지막 말에 혀를 찼다. 히라츠카 선생님치고는 드물게 분노의 체현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확인할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본래라면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는걸로 히라츠카 선생님의 신뢰에 대답할 수 있지만, 지금은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잠시 침묵이 이어져, 5분전 예비종이 울어서 히라츠카 선생님은 교실을 뒤로했다. 나는 오후 수업을 전부 결석하고, 계속 더러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계속. 의미도 없이.
◆◆◆
"왠 일이래! 하치만이 불러주고!!"
방과후, 도저히 이로하하고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토츠카 사이카를 놀자고 불렀다. 마침 테니스 코트를 눈이 와서 쓸 수 없었다며 근육 트레이닝만 하고 빨리 끝낼 예정이었다는 모양이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괜찮다고 했다.
"그럼 나는 도서실에라도 가 있을게"
도서실, 그 선택지는 스스로도 도망이라는걸 알고 있다.
"그것도 드물네. 하치만은 이전만큼 도서실 이용하지 않게 됐는데"
이유는 하나.
잇시키 이로하가 책을 읽지 않으니까.
도서실을 찾아가니, 귀가 전차가 눈 때문에 운행정지가 되어 있는 귀가부나 사이카랑 마찬가지로 운동장을 쓸 수 없는 운동부나, 그저 단순히 도서실을 이용하는 학생들로 넘쳐나 있었다. 추우므로 창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정체된 공기가 천천히 더러워져, 지금은 어엿한 바이러스 발생지역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어선 평화로운 도서실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퇴실하려던 순간,
"어라, 히키타니잖아"
라며 말을 걸어온 안경, 에비나 히나였다.
"어, 어어……"
수학여행 일건이 있어서 그 후로는 이로하와 사귄 관계상, 가장 거북한 상대는 이 부녀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에비나도 그게 포즈라는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입지 않는건 아니다. 우리들의 관계는 이전보다도 일그러진 상태가 되어 있었다.
"혹시 도서실 뒤에서 토벳치랑!?"
요즘 뭔가를 구실로 토베랑 나를 엮으려고 하는 에비나였지만 그 이유에 색파로 대하는 질투는 담겨있지 않는걸까. 라는건 조금 자의식 과잉인가.
"아니, 사이카 기다"
"와와와, 왔――"
세계 육상 오다 유지처럼 소리를 지르려는 에비나의 입을 막는다. 손에 습기와 진동이 움찔움찔 전해져서 조금 흥분해버리는 내가 있었다. 이 녀석 정말로 쌈바 디투 나이트(의미불명).
"도서실에서는 조용히. 오케이?"
삼류 호러 영화니 액션 영화에선 친숙한, 소리를 지르면 위험하다는 일련의 흐름이 생긴것에 약간 감동을 포함하면서 나는 천천히 손을 뗀다. 에비나는 조금 볼을 붉히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야 입을 막히면 얼굴도 빨개지나.
"아, 잠깐만 복도로 와줘 히키타니. 좋은거 가르쳐줄게"
라며 내 팔을 잡아당기는 에비나. 그 옆얼굴은 같은 미디엄 헤어인 잇시키와 겹쳐서 조금이지만 동요해버렸다.
"우와-, 역시 복도는 춥네-"
내 팔을 놓은 에비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문지르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 얼굴은 심술궂은 아이가 장난을 친 후에 보여주는 '달성감' 같은 표정이라서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생각외로 그녀의 말은 나를――구해주게 된다.
"있잖아, 요즘 책 빌려봐?"
"아니, 거의 안 빌려"
"그렇지-. 그런거지-"
"뭐? 내가 단순히 문학소년인척하는 중2병이라고 하고 싶은거야?"
"으응, 아니야. 만약 최근에도 여기를 이용했으면 그런 상태는 안 됐으려나 해서"
"그런 상태……?"
"잠깐만 기다려"
라며 도서실로 돌아가는 에비나. 그리고 바로 책을 들고 돌아온다.
"자, 문제야. 이건 네가 빌린적이 있는 책이야. 이전과 다른 점을 말해보세요"
건내받은 책은 흙색의 문고본. 내용조차 기억 못하는 흔해빠진 제목이다.
"……더럽다거나?"
"그런거 문제로 내서 재미있다고 생각해?"
지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에비나. 나는 한번 더 표지에 눈을 떨군다.
겉보기에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업삳. 추측한다면 그녀가 희희낙락거리며 문제로 삼았다는 점이며, 동시에 책에 변화를 가져오는 무언가다.
페이지가 빠져있다는것 같은 누구나 아는 정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낙서인가? 사랑의 고백인가? 하지만 어느 페이지에도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걸 자각할 정도로 책을 쳐다보니 에비나가 손가락을 세우며 입을 연다.
"힌트, 귀를 기울여봐!"
아니, 그거 답 아니잖아.
지브리를 각별하게 사랑하는 지블러를 얕보지마. 지금은 아시타카가 타타라장의 문을 닫는 장면으로 울 수 있을 정도거든?
그리고 책을 뒷표지부터 연다.
거기에는 대출 카드가 있고, 그리고――,
12월 17일 잇시키 이로하
・
・
・
5월 12일 히키가야 하치만
이라고 스여있었다.
"얘얘! 어떤 기분? 지금 어떤 기분?"
부추겨오는 에비나. 아니, 그건 이럴때 쓰는 말이 아니거든.
하지만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 물으면, 그렇군……
"……후힛"
"우와아, 기분 나빠"
식겁하는 에비나를 곁눈으로 내 안에서 망상은 점점 부풀어간다.
"혹시 내가 읽은 책 전부?"
"응, 그런것 같아"
에비나는 끄덕인다. ……진짜냐.
확실히 요즘 단어량이 느는건 눈을 휘둥그레 만들 정도였다. 사귀기 시작했던 롤러가 오케이라는 수준의 보케는 지금은 거의 없다. 그런건 물론 내가 이 녀석 대단한데, 라고 생각할 법한 표현을 팍팍 했었다.
(내 기호에 맞추고 있었나……)
그리고 깨닫는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지?
사건이 있을때마다 그녀의 힘이 되어왔다. 그녀를 도와줬다. 그녀를 존중해왔다.
하지만 그건 '안 하면 안 되니까'한것 뿐인게 아닌가?
나 자신의 의사로 잇시키 이로하에게 무언가를 한 적이 있던가?
이로하가 나를 알기 위해 내가 읽은 책을 뒤쫓듯이, 내가 그녀를 알기 위해 무언가를 한 적이 있었나?
그 질문은 더 이상 생각할것 까지도 없이 명백했다.
"에비나……고마워"
"응, 괜찮아"
조금 패기없는 목소리가 신경쓰였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이로하에 관해서 머리가 가득했다.
일단 사이카에게 방과후 데이트를 거절하려고 한발짝 내딛은 순간,
"……눈치채지 못했나…"
라며 에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걸 알아채지는 못했다.
히키가야 하치만은 그 정도로 서툰 남자였던 것이다.
(……거짓말, 실은 눈치챈 주제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나는 멈춰선다. 그리고 발꿈치를 돌려 에비나의 앞에 선다.
"……어랄라, 들려버렸나"
"그래, 들렸어"
내가 끄덕이자 에비나는 "정말 수줍네에" 라며 조금 슬프게 말했다.
"저기 말야, 착각으로도 스토커라고 생각하지만. 반쯤은 재미있어서 한것 뿐이니까"
나는 살짝 끄덕인다. 실제로 '내가 비린 책을 이로하가 빌렸는지 아닌지'는 스토커라면 분노로 멋대로 단정지을테니까. 그저 내가 조금 신경 쓰였던건,
"그럼 남은 반은?"
"……연심"
듣는게 아니었다. 조금 뀽해버렸다.
"응, 그래 히키타니. 하지만 그 이상은 묻지 말아줄래"
에비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대답한다.
"아아, 안 물을게.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누구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짓은 안 할거야.
잇시키 이로하가 좋아하는 나는 누구에게서도, 무엇으로부터도 도망치지는――"
그 순간, 도서실 창문이 드르륵 열린다.
거기에는 얼굴을 새빨갛게 만든 잇시키 이로하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부 다 들리거든요! 무진장 부끄러워서 창문으로 뛰어내릴것 같거든요!"
라고 말했다. 안에 있는 학생들이 쿡쿡 웃고 있었다.
"아, 으……"
에비나가 드물게도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고 허둥대고 있었다.
이로하는 반대로 차분함을 되찾았는지 에비나를 향해,
"에비나 선배, 이런 글러먹고 외톨이지만 마음을 짓밟는 짓은 안 하니까, 제대로 전하는 편이 좋다구요?"
라고 말했다. 그 표정은 다정한 미소를 지 시고 있어서, 나는 나를 디스 당한것조차도 순간 깨닫지 못했다.
"응, 하지만 괜찮아. 몰래 전하는 작전으로 갈거니까"
에비나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이로하에게 대답한다.
"라이벌 선언이라는건가요?"
"으음, 어느쪽이냐고 하면 하극상 선언?"
"그건 무섭네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
"……하치군은 기분 나쁘지만 저를 좋아하니까요"
"어떠려나?"
"………"
본인을 눈 앞에 두고 할 얘기가 아니잖아. 위장에 구멍 뚫린다고. 상처 입었나?
"그럼 갈게, 잇시키, 히키타니"
에비나는 만족스런 얼굴로 손을 흔들고 마지막으로
"아, 그래 맞아. 라이벌은 나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거든?"
라며 폭탄을 투하하고 가버린 것이었다.
"……라는 모양인데요, 에로가야 선배?"
"……난데없이 선배라고 부르지 말아줘, 리얼충 스러워서 토하겠다"
왠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로하를 너무 좋아하고, 그녀는 내가 읽은 책을 뒤쫓을 정도로 홀딱 반한 모양이다.
………………후힛.
◆◆◆
귀가길, 이로하는 평소 끼던 장갑을 벗고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이른바 연인깎지라고 하는고로, 나는 심장이 쿵쾅거려서 대화할 참이 아니다.
"잠깐, 하치군. 손 잡은것 정도로 그래선 장래에는 좀 더 대단한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좀 더 대단한것……역시 그건….
"우와, 지금 야한 상상했죠. 기분 나빠요 죄송해요. 신고해도 되요?"
"아직 미수잖아"
쿡쿡 웃으면서 이로하는 내 손을 붕붕 흔든다.
"정말이지 하치군은 저를 좋아하지요"
"안 그러면 안 사귈거 아냐"
"그런거 아니에요-. 세상에는 스테이터스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 말로 떠오르는 인물은,
"타마나와냐……"
"정말이지, 싫다구요. 그 사람은 이로하가 학생회장이니까 노리는거라구요. 정확하게는 학생회장이라서 쉬울것 같다는게 이유겠지만요"
"자각 있는건가……"
내 딴죽에 이로하는 "아니에요!" 라고 분개했다.
"어떤 의미로 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내가 연하에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그리 도움이 안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이로하는 끄덕인다.
허나 과연 그럴까.
타마나와라는 남자가 주위 분위기에 흘러가는 남자고, 타인과 우열을 가리는 타입이라는건 안다. 실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하지만.
"하지만 그런 남자가 굳이 소부까지 와서 너를 만나려고 할까"
"……뭐, 역시 그건 놀랬어요"
그보다 알고 있었냐.
"당연하잖아요. 한발짝 잘못 내딛으면 제 책임이라구요. 조심해주세요"
학생의 풍기를 보호하는것도 학생회의 일이다. 그러니까 그 때 타교의 학생과 말썽이 있으면 그건 학생회의 책임이며, 학생회장의 책임이 된다는 건가.
"아아, 미안"
"뭐, 조금은 기뻤지만요"
중얼거리며 고개를 홱 돌리는 이로하. 솔직히 껴안고 싶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지킬 수 없을것 같군"
"좀, 지킨다니 부끄러워요. 그만두세요"
"어, 어어. 그럼 바꿔 말할게"
"역시 안 돼요. 이로하를 지킨다고 말해주세요"
"……이번 발렌타인은 이로하를 지킬 수 없을지도"
"………후힛"
으음, 이런 전개(웃음).
"괜찮아요. 저는 의외로 가드가 단단하구요"
"아니, 네가 아무리 가드가 높아도 그 녀석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면 어떡할건데"
예를 들면 학생회장 끼리 손을 잡고 사이 좋게 지내자는 분위기를 만들었을때, 학생회장으로서 상대의 말에 영합할 수 있을지 아닌지. 좀 더 직접적으로, 다수의 앞에서 "얼마전에 사귀기로 했다"라고 했을때는 부정하는 것으로 이로하가 거짓말을 해버리게 되면 문제가 되버릴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그걸 캥겨하지도 않고, 아니 악의없이 할 수 있는 남자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묘한 구석에서 머리가 돌아간다.
"으음, 조금 어쩌지 못하겠네요"
남일처럼 말하지만 그 얼굴은 경직되어 있어서 실제로 손을든 상태다.
"……다행히 아직 일주일 이상 남았어. 좋은 대안이 떠오를거야"
"뭐, 그러면 좋겠지만요"
◆◆◆
이 시기가 되면 마침내 수험생의 안색이 위험해진다. 뭐가 위험하냐고 하면 가족마저도 적으로 인식할 정도로 위험하다. 위험해 위험해 코마치가 위험해.
하지만 어딘가에서 힘내고 있는 자신을 칭찬해줬으면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없는 거실에서 슥슥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코마치의 머리를 툭 치고 귀가를 알렸다.
"다녀왔어"
"아, 오빠, 어서왔긔"
잠깐, 코마치. 그 인사는 그만두자(공포).
라는건 (이유를 물으면 곤란하므로) 말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시도해본다.
"그러고보니 요즘 또 리듬 소재가 유행하고 있군"
"응, 맞아-. 학교에서 다들 따라하고 있어"
야야, 수험 시즌에 리듬 소재 피로하는건 위기감 없냐.
"라고해도 편차치 낮은 곳에 가는 여유조지만"
"아아, 그런건가"
대화의 캐치볼은 있지만 코마치의 시선은 항상 노트를 향하고 있었다.
라고할까, 그거구만. 수험생의 대화는 한때 유행한 질문에 대답하는것 만으로 떠오르는 인물을 맞추는 어플이랑 닮았군. 다른 점은 어플은 떠오른 인물에게 가고 싶어하지만, 수험생은 뭐든 수험 얘기로 바꾸는 점……아니, 전혀 다르잖아.
오히려 그건가, 위키피디아의 링크를 5번이나 7번으로 떠오르는 페이지로 날아간다고 하는 소재에 가깝나. 어떤 단어든 최종적으로는 수험에 도달한다……응, 이거로군. 하치만 소재 노트에 또 하나 늘었다.
"……후힛"
"그러고보니 오빠는 발렌타인 초콜렛 받을것 같아?"
갑자기 떠올른 데자뷰에 당혹해하면서도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고 대답한다.
"오오, 뭐 초콜렛을 못받을 역사 나이는 탈출했잖아"
자랑은 아니지만 불행의 편지라면 나이의 10배 정도는 받았다. ……진짜로 자랑 아냐.
"아아-, 올해는 누구에게도 못 줄것 같네에……"
"엥, 잠깐만. 뭐야 그거 오빠 처음 들어"
올해'는' 이라는건 지금까지는 준 적이 있어? 그 사라마의 이름이랑 주소 가르쳐줄래? 지금 당장――
"우정 초콜렛이야. 우정 초콜렛. 오빠의 사랑이 너무 무거워서 코마치 가출할것 같아"
후- 하마터면 범죄자가 될뻔했다. 하지만 치니구에게 건내는 초콜렛은 여자애지, 코마치?
"아, 그러고보니 발렌타인에 특별 방송이 있어서 레포터 사람이 치바현에 살고 있는 러브러브 커플에게 돌격한대. 게다가 사전에 모집하고 있으니까 오빠도 나가보지?"
"헤-, 남에게 사랑을 보여주다니 자의식 과이……잉"
순간, 모든 점이 이어져 하나의 큰 도형을 그린다. 방송 스태프의 입장으로 보면 이런 먹음직스런 화제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고등학생 주체로 행해진다고 하면 텔레비전에 비치는 남녀가 몰려있다고 생각할터.
"코마치, 사랑한다"
"으음, 사랑보다 합격이 필요한데에"
과연 내 동생, 위트가 넘쳐난다니까!
◆◆◆
발렌타인 데이 당일. 나는 학생회 자선 행사에 참가하고 있었다. 히키가야는 싫지만 봉사부의 멤버는 내버릴 수 없다는 수수께끼 이론의 유키노시타 씨랑 힛키를 위해서라면 설령 땅끝까지라도 간다고 하는 믿음직스런 유이가하마도 함께다.
"안녕 어……, 너까지 온건 의외인데"
타마나와는 고의적으로 말했다. 뜻밖에도 사복 센스는 좋아서 겉보기는 좋았다.
"아아, 역시 여친이랑 보내고 싶으니까"
견제구를 던지자 그는 무엇 하나 동요하지 않고,
"흐응, 뭐 자선 행사에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참가하는 시점에서 결과는 보이지만"
라며 꽤 정상적인 대답을 들어서 내 마음은 바로 부러질뻔했다. 뭐야 이 녀석, 좀 더 이상한 녀석이었잖아.
"………둘 다 오늘은 잘 부탁해"
뭐야 지금 간격은. 특히 유키노시타를 보니 눈이 보통이 아니었다. 뭐, 크리스마스 모임에서 실컷 들었으니까 다소 원망은 있겠지만.
유키노시타도 그걸 느꼈는지 불평을 하려고 한 발짝 나선다. 그 순간, 타마나와의 옆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단정한 얼굴의 여성이 한 명……유키노시타 하루노다.
"얏하로-, 유키노♪ 가하마♪ 그리고 달링♪"
하루노 씨는 발렌타인 데이라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빨강색을 기초로 한 옷으로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존재감이 있었다. 솔직히 에로하다. 지나치게 에로해.
그리고 동시에 나는 모든걸 깨달았다.
"……당신이 흑막이었나…"
"흑막? 무슨 소릴까냥-?"
마왕을 상대해도 구슬려질뿐이라서 나는 타마나와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 사람이 나온다는건, 이 자리를 준비했다는것만이 대책이 아닐것 같군"
"대책? 뭘 착각하는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유키노시타 씨에게 단련받은것 뿐이야.
누구에게든 가슴을 펼 수 있는 남자가 되도록 말이야"
그 안광은 날카로워서 이전같은 위태로움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힘이 흘러넘쳐서 스스로 말하는것도 뭐하지만 남자다움을 갈고 닦은 걸테지.
"유키노랑 가하마는 언니랑 이쪽이야~♪"
라며 억지로 둘의 팔을 잡는 하루노 씨.
"그래, 언니. 바라던바야"
"후에에!? 히, 힛키 힘내!"
유키노시타는 뭘 바라고 있었는지 짐작도 안 가지만, 믿음직스런 아군을 둘을 잃은 나는 조금이지만 불안해졌다. 마왕이 준비한 무대에서 마왕에게 단련받은 남자와 단 하나의 대책으로 싸우는건 지나치게 무모하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유키노시타 씨"
"에-, 나는 아무것도 안 했대도-"
대단한 대화로 웃고 떠드는 타마나와와 하루노 씨를 보고 있으니, 뭔가 밋밋한 위화감이 있었다. 타마나와의 저 신뢰하는 눈동자 속에는 이전에 흘러넘치던 수상쩍음이 전혀 없다. 정말로 이 녀석, 크리스마스 모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던 남자와 동일인물인가?
"자, 어음, 히키가야였나? 너에게도 일이 있는데, 할래?"
어차피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겠지, 타마나와의 눈은 말보다도 웅변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하는게 당연하지. 소부고등학교의 학생회에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봉사부의 참가……라기보다 나의 참가는 이로하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실수를 일으키면 필연적으로 여파는 학생회에 간다.
"……아아, 그랬지"
별로 흥미없다는듯이 타마나와는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은 뜻밖에도 이로하와 함께 초콜렛을 나누는 일이었다.
◆◆◆
"왠지 의외네요-"
"아아"
상자 가득 담긴 초콜렛을 남녀노소에게 나누며 걷는다. 일부러 발렌타인 자선파티를 해서 개최된 곳에 온 사람이니까 싫은 얼굴을 하는 녀석은 없다. 하지만 이로하와 내가 동시에 나눠주게 되면 한 쪽의 사람이 유감스러운 얼굴을 한다. ……물론 나에게 건내받은 사람이다.
"아, 내가 나눠줄테니까 하치군은 초콜렛을 나한테 건내줘요"
그렇게 말하고 상자를 건내온다. 얼뤠에, 이건 내가 짐꾼이 된것 뿐이잖아…….
"드세요-♪ 맛있어요-♪"
……뭐, 확실히 이로하가 나눠주는 편이 컨셉에 맞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이로하가 나눠주기 쉽게 힘쓸 뿐이다.
순식간에 초콜렛을 다 나누고 나와 이로하는 스태프 휴게실로 찾아간다.
"아-, 지쳤어요. 하치군이 제대로 일해주지 않으니까아……"
불평 하나 할 수 없다. 실제로 미소지은채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초콜렛을 나눠준다는건 성가시니까. 도리어 대량으로 초콜렛을 받은 사람도 성가시겠지만……아토베님이나 아토베님이나 아토베님이나.
"저기말야, 이거 다음에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요-. 적당하게 떠들고 해산이에요"
저번 크리스마스 모임과 달리, 주체가 자치체이기 때문에 소부도 카이힌도 보조 이외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럼 왜 초콜렛을 줄 수 없다고 한거야?"
"아-, 으-, ……이제 됐잖아요"
라며 고개를 홱 돌리는 이로하. 뭔가 대답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요리를 못해? ……아니, 정기적으로 도시락을 만들어주는 이로하가 초콜렛을 못 만든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역시, 오늘 자체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 가정환경도 아니고, 돈이 없다는것도 아니다. 가족에게도 지금은 공인을 받았고, 역시 원인은 타마나와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혹은……,
"나한테 주고 싶지……않아?"
"왜 그렇게 되는거에요!!"
휴게실에 노성이 울려퍼졌다. 카이힌 학생이 힐끔 이쪽을 쳐다본다.
"아, 아니……저기…미안"
아무 반론도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지금 말은 해서는 안 됐다.
반대 입장이라면 상처입는다, 굉장히, 무척이나 깊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신뢰의 문제다.
"……아뇨, 저도 하치군의 다정함에 응석부렸어요. 죄송해요"
이로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그 눈동자에는 명확한 의사가 있었다. 무언가와 싸운다는 강한 의사가.
그리고, 그 무언가는 '잇시키 이로하 자신'이라는걸 알았다.
"……실은 있다구요. ……초콜렛"
그렇게 말하고 이로하는 가방에서 핑크색 포장지로 귀엽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한 손에 올릴 정도의 정사각형 상자다.
"어으……어?"
"……여기서부터는 자선 파티가 끝나고나서 해도 돼?"
갑자기 날아드는 반말. 올려다보기로 빤히 쳐다보면,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폭발할것 같다.
"어, 어어……"
나는 어색하게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초콜렛이 들어있을 상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로 단순(울상.
◆◆◆
휴식이 끝날때 맥스 커피라도 마시려고 자동 판매기로 향한다. 회장 시민회관의 자동판매기는 입구에만 있기 때문에 안쪽 스태프 휴게소에서는 조금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얼마간 사고의 늪에 몸을 담글 수가 있다. 그 는ㅍ이 바닥이 업서는 늪이 아니기를 빌자. 웅성웅성.
이로하가 초콜렛을 건낼 수 없다고 말한 이유.
유키노시타 하루노가 흑막인 이유.
타마나와의 위화감.
그것들의 점은 한 편으로는 굉장히 엉망진창이면서 무엇 하나 공통점을 보여주지 않듯이 보인다. ……하지만 어딘가 법칙성같은 규칙성같은 무언가를 느끼는데….
또렷한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라도 나타나는 무언가. 그로 인해 극적으로 변화를 보이는건 아니지만 있는것과 없는건 전혀 다른 것이 되는 무언가.
"……대체 뭐지?"
갖고 있지 않은 녀석에게는 보여줄 수 업서는 것일까. 아니, 그런건 아닐 것이다.
"이런데서 뭐하는거야"
갑자기 눈 앞에서 꽂히는 날카로운 말투. 퍼뜩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확실히 알고 있는 목소리. 어음, 누구였더라…….
"……사키 씨"
그래. 사키 씨다, 사키 씨. 왠지 뒤쪽에 가명이라고 붙이고 싶다. 사키 씨(가명_의 엽서입니다. 츠가루 해협의 겨울 풍경, 보세요. 아니, 보세요가 아니잖아.
"하, 하아!? 어어어, 어째서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는거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소리지르는 사키 씨. 아니, 왜냐니 사키 씨 말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는게 뻔하잖아.
"뭐 괜찮잖아. 그보다 너도 자선 파티에 참가하는거야?"
"차선 파티? 나는 케짱을 마중나온것 뿐인데?"
즉, 자선 파티에 참가하는건 동생이라는건가. 왜 동생인 케짱은 바로 떠오르는데 카와사키는 떠오르지 않는거야…….
"잠깐만 기다려……어음"
상의 주머니를 뒤지니, ……있었다.
"자"
"……어, 뭐야 이거"
라며 건낸 초콜렛을 쳐다보며 당혹해하는 카와사키. 아니, 뭐냐니 자선 파티용 초콜렛인데…….
"별로 신경쓰지마. 우리는 여기서 초콜렛을 나눠주고 있어"
그럴 경우 무슨 초콜렛이 되는걸까. 의리로 주는건 아니고, 친구로서 건내는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의무 초콜렛? 왠지 볼륨이 있어 보이는군.
"받을 수 없어"
라며 카와사키는 받아든 초콜렛을 돌려줬다.
"아니, 그러니까 깊은 의미는 없다고"
"그건 네가 정하는게 아니야"
……무슨 의미야?
내가 납득하지 않는 얼굴을 하는걸 보고 카와사키는 적의와 같은, 하지만 조금은 다른 감정도 섞인 분위기를 띠며 노려본다.
"너, 자신을 마스코트 인형이나 그런걸로 생각하는거야?"
"……?"
"네가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네 행동에 의미를 보는 사람이 있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고, 낙담하는 사람이 있어. 히키가야 하치만은 마스코트도 아니거니와 공기도 아니야. 그런데서 착각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아?"
――――투욱.
요즘, 몇 번이고 떨어지는 간담이 또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래, 그런거다.
히키가야 하치만이라는 인간은, 이로하나 봉사부와 만날때까지는 거의 같은 감정을 받아왔다. 그래, '마이너스 감정'이다. 그건 적의든 조소든 여러 형태로 바꿔왔지만, 그 색은 언제나 검은색. 알기 쉽기 짝이없다.
그러니까 나는 착각을 했다. ――다른 사람은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하지 않는다고.
잇시키 이로하는 저렇게 보여도 심지가 강한, 마음 든든한 여자애다.
그렇게 결론짓는건 그녀가 아니다. ……나다.
타마나와가 변했다고 결론지은것도 나. 하루노 씨가 놀이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느낀것도 나. 모두 나의 멋대로 된 망상이다.
……하지만 그녀들도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
마음 약해지는 일도 있거니와 허세도 부린다. 멋도 부리고, 응석도 부리고, 일부러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런가, 그런건가"
"알았으면 다행――"
"또 도움 받았구만! 사랑한다고, 카와사키!!"
"읏!!? 너는 또 그렇게!!"
카와사키가 분개해서 뭔가를 소리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럴 참이 아니었다.
◆◆◆
회장으로 돌아오니 장내가 웅성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 '텔레비전 카메라'다.
"네, 여기는 시민회관의 사토입니다"
하루노 씨 정도는 아니지만 예쁜 얼굴의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촬영 스태프도 몇 명있고, 그걸 둘러싸듯이 자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그녀들을 보고 있었다.
"그럼 응모해주신 분은 어느 분이십니까?"
라며 조금 과장스런 움직임으로 사람을 찾는 아나운서를 향해 유이가하마가 손을 든다.
"아, 네, 저에요"
오-, 마침내 유이가하마의 바보 귀여운 모습이 치바현에 알려지는건가. 왠지 감개 깊은데. 아무쪼록 바보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무리인가.
"놀랍게도 응모해주신 분은 이렇게나 귀여운 여고생입니다!"
"아, 아하하, 얏하로-"
당혹해하면서도 수수께끼의 인사를 시청자에게 퍼뜨리는 유이가하마. 이거 혹시 올해 유행어 대상 타는거 아냐? 그러면 내가 발안자로서 입후보를 하자.
"그래서, 치바현 제일의 러브 커플은……"
이 또한 과장스럽게 두리번두리번 찾는 아나운서, 타마나와가 힐끔 하루노 씨에게 눈짓을 하고 천천히 손을 든다.
"오오! 이거 또 학생인가요!?"
라며 종종걸음으로 타마나와를 향해 가는 아나운서.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유이가하마가 작전과 다르다고, 이쪽에 필사적으로 눈짓했지만 나는 굳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초의 작전은 텔레비전 너머로 이로하와 러브러브함을 어필해서 관계를 반석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타마나와의 입장상, 공인 커플에게 손을 댈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깨달아버렸다.
이로하의, 타마나와의, 그리고 하루노 씨의 마음을.
(그럼 할 수 있는건 하나 밖에 없잖아……)
가볍게 손을 쥐락펴락한다. 응,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럼 당신이 초콜렛을 건낼 러브러브 커플 씨는-?"
아마 연출상 드럼롤이라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아나운서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돌아보며, 스태프 중 한 사람이 스케치북을 아나운서와 타마나와에게 보여주고 있다.
만약 타마나와가 하루노 씨를 지명하며녀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을거다. 하지만 만약 이로하를 선택한다고 하면, 그 때는…….
"네, 하세요!!"
아나운서의 호령과 함께 타마나와는 팔을 든다. 그리고――,
"호에? 나?"
라며 지명된 이로하는 어리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호호오, 여자친구는 당신인가요!? 귀엽네――"
"어, 어이, 그만해!"
갑자기 카메라 스태프의 목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의 주목이 아나운서로부터 그쪽으로 이동한다. 뭐, 내가 카메라의 전원을 꺼버렸으니까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지만.
"힛키!?"
라며 소리를 지르는 유이가하마.
"흐응-"
하며 요염하게 웃는 하루노 씨.
"………"
나는 카메라 스태프로부터 떨어져 타마나와의 앞에 선다.
"여어, 거짓말쟁이"
라고 말을 거니, 방금전까지의 허세는 어디갔는지 눈을 두리번두리번 요동치는 타마나와.
"무, 무슨 소리야?"
"위화감이 있었거든"
"위화감?"
"아아, 처음 위화감은 크리스마스 파티때는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는것처럼 말하고 책임을 엷게 퍼뜨리는 남자가, 학생회장이라는 직책을 짊어진채 점심시간에 소부에 오는건 말도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어"
"그건 내가 잇시키를……"
"그럼 어째서 그렇게까지 허둥대지? 뭐가 너를 망설이게 만드는거지?"
솔직히 이 녀석의 마음은 아플만큼 안다. 자신을 이끌어준 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아이같은 감정.
"타마나와……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를 위해 행동을 하든 나하고는 관계없고, 흥미도 없어. 하지만!!"
멱살을 움켜쥐고 몸을 끌어당긴다. 허둥대는 타마나와의 몸은 생각한것 이상으로 가볍다.
"자기 사정 때문에 내 여자에게 손을 대지마"
팔을 떨리고 목소리는 쉬고, 말은 잘 나오지 않는다.
익숙치 않은 행동에 몸이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전하는건 할 수 있다. 남은건 내 문제가 아니다. 타마나와의 문제다.
"……나는…"
그대로 타마나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샌가 텔레비전 스태프는 물러나있었다. 역시 발렌타인 기획으로 여자를 둘러싸는 구도는 방송할 수 없다는 결론인 것이다.
자선 행사 자체도 대부분은 끝나서 그대로 스르륵 해산하게 됐다. 학생 참가자들은 마지막까지 정리를 돕고, 그대로 구분없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
그리고 나는――.
"어음, 이건 저 필요합니까?"
시민회관의 뒤, 타마나와랑 하루노 씨의 옆에 나는 서 있었다. 타마나와는 자신감 없다는듯이 고개숙이고 있고 하루노 씨는 재미없다는듯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그야 네가 '깨달아버렸'으니까 마지막까지 신경써줄 책임이 있잖니?"
라며 하루노 씨가 가시 있는 말투로 말을 하니, 타마나와는 움찔하며 몸을 떤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자신이 없었어. 학생회장이 되고나서도 나에게 대역을 맡을 수 있을지, 누가 나를 바보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것만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
타마나와의 말을 하루노 씨는 묵묵히 들었다. 그건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평소라면 일도양단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럴때, 당신은 나타났어요. 크리스마스 모임 이래로, 계쏙 저를 단련시켜줬죠. 이끌어줬어요. 그러니까 저는……"
"좋아하게 됐어?"
하루노 씨의 똑바른 말에 타마나와는 울것같은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끄덕인다.
"네……에. 하지만 지금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천천히 인정받으면 된다고……그렇게 생각해서…"
깨닫고 보니 타마나와는 울고 있었다.
하루노 씨에게 기대받는것, 그 중압은 잴 수 없는 거서이다. 거기다 그녀에게 연심마저 품은 날에는 국민으로부터 기대받는 용사같은 감정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마음이며, 그녀에 대한 과대평가이며 과대망상이다.
"타마나와"
이름을 불려서 타마나와는 기대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표저어으로 하루노 씨를 봤다. 나는 어느샌가 그에게 감정이입해버려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서 마음이 찢어질듯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대개 들어맞아서,
"하나만 가르쳐줄게"
"여자애는 귀여움받는걸 좋아해"
타마나와는 천천히 시선을 떠룩고,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뒷길로 사라지는 그를 쳐다보고 하루노 씨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말로 쓸데없는 짓을 해줬구나 히키가야"
노골적이게 노려보는 그녀에게 나는 더는 겁먹지는 않는다.
"하루노 씨의 마음에는 대답할 수 없으니까요"
"뭐야 그거, 자의식과잉 아니야?"
쿡쿡 웃는 하루노 씨. 하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분명 당신을 귀여워해줄 사람은 있을거에요"
일방적으로 유키노시타 하루노를 즐기는게 아닌, 유키노시타 하루노'와' 인생을 즐기는 그런 상대가.
"……나는 너한테 그걸 기대했는데…"
그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넘치는 유키노시타 하루노가 아닌, '한 명의 여자애'의 목소리였다.
"저에게는 짐이 너무 크다구요"
"실은 아깝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그렇게 말해주길 원해요?"
라고 물으니,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며 눈을 피하는 하루노 씨.
"……이 에로가야"
어딘가에서 들은 호칭이지만 하루노 씨의 입으로 들으니 전혀 다른 단어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것보다도 무엇보다,
멀리서 이로하가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게,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던 나는 역시 하루노 씨의 기대에는 대답할 수 없는거겠지.
◆◆◆
귀가길, 이로하는 평소가던 공원에 들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눈가루가 녹은 흙색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이로하는 꼬옥 나를 껴안아온다.
"……우-, 좋아해요-"
아마 하루노 씨와 무어너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던 것이다. 겁에 질린 그녀는 무척이나 귀엽고, 또 빨리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에 사로잡힌다.
"괜찮아, 그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잠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에요, 저 아무 생각도 안 했다구요……, 하치군은 저 말고 누구도 못 다루구요……"
점점 기세가 줄어들어간다. 그리고 껴안은채로 올려다보면서,
"다루지 않을……거죠?"
라고 말했다. 너무 귀여워서 먹어버릴것 같았다. 우와 나 엄청 기분 나빠.
"뭐, 반대로 이렇게 약삭빠른 여자애, 나 말고는 못 다룬다고"
"우와, 뭐에요 그 도량 넓다는 선언. 좀 기분 나쁜데요"
으-음, 이 뜨거운 손바닥뒤집기(웃음)
"하지만 깨달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툭, 머리를 얹으니 이로하는 기쁜듯이 "우냐" 라고 울었다.
"초콜렛을 건낼 수 없다고 한건 SOS 신호였구나"
이로하는 잠시 뜸을 둔 후에 작은 목소리로 "응" 하고 말했다.
그래, 그건 나에게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노골적이게 "타마나와가 대쉬하니까 도와줘요"라고 말해버리면 자의식과잉이라고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넌지시 마음을 끌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잇시키 이로하의 '약한점'이 만들어낸 오해. 그리고 나 자신이 그녀를 단순한 여자애라고 알면서도 어딘가에서 만화에 나올법한 헌신적이고 기운차고 강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떠한 일이든 나를 우선해줄거라고 자기 멋대로 만들어낸 생각이 생겨나버렸다.
"다읍부터는 똑바로 말해주라고?"
"응……"
"나는 이로하 외곬이니까 말야?"
"응……"
"나도 좋아하니까"
"응, 좋아해"
그리고 천천히 몸을 뗀 이로하는 가방에서 휴게소에서 보여준 상자를 꺼낸다.
"니히-(하트) 실은 있었습니다-♪"
"아니, 알고 있는데"
"재미없는 사람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히쭉거리는 얼굴로 이로하는 내용물을 꺼낸다. 아니, 내가 열게 해주지 않는거냐.
거기에는 하트모양의 초콜렛이 있었다. 하얀 초콜렛 펜으로 '하치군'이라고 쓰여있다. 이 녀석, 여자력 높아…….
"……저도 오늘 피곤하니까 반 먹어도 되나요?"
볼을 붉히면서 부탁하는 이로하. 물론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그럼, ……음"
하고 하트의 한쪽을 입에 무는 이로하. 설마……?
"음"
눈을 감고, 입으로 받친 초콜렛을 나에게 향한다. 빼빼로 게임의 초콜렛 버전을 하라는건가…….
주위에 유키노시타 말고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 천천히 반대측 초콜렛을 입에 넣는다. 서로의 이마가 부딪치고 코끝이 스쳤다. ……왠지 엄청 흥분된다.
잠시 서로 쳐다보고, 그리고……,
""후힛""
웃은 순간에 초콜렛이 깨져 대부분이 떨어져버렸다.
나는 씻어서 먹는다고 말했지만, 이로하는 또 만들거라면서 각하한다.
그리고, 초콜렛으로 더러워진 입술을 겹쳐서 다시 사랑의 달콤함을 알게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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