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네 파편 - 봉사부.
 
 
"입실할때는 노크를 한다. 그런 상식도 모르게 되어버린거니? 히키가야"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읽던 책에 착갈피를 끼우고 정중히 책상에 놓는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놓여진 책의 페이지를, 길고 아름다운 유키노시타의 흑발을 나부낀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같은 아름다움이라 저도 모르게 숨을 쉬는것도 잊어버릴 정도다. 원래 어른스러웠던 유키노시타가 조금 못 본 사이에 더 어른이 됐다고 생각한다.
어른스런 소녀가 어른 여성으로 변했다고 해야할까.
뭐 일부분은 소녀인 상태인 모양이지만….
 
"뭔가 불온한 분위기를 느끼는데"
 
너는 에스퍼냐고. 왜 내가 생각하는걸 아는데. 무서워.
 
짧게 숨을 내쉬고 기막힌듯한 표정을 짓는 유키노시타.
미안해. 왠지 여러모로.
 
"그런데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러니? 아마 길어질테고 말이야"
 
"어, 어어. 그것도 그렇군"
 
가까이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마침 유키노시타하고는 대각선상에 위치하는 이 자리. 여기가 나의 정위치다.
 
오랜만의 재회라 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립니다. 부정맥인가?
 
문득 시선을 느껴서 유키노시타 쪽을 쳐다보니 말없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위압하고 있었다. 뭐야 무서워. 석화해버릴것 같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마.
 
"무, 무슨 일 있어?"
 
"일이라고 할것도 없지만, 어디의 누군가가 전혀 연락을 주지 않으니까 걱정하고 있었어. 유이가하마는"
 
"그 도치법으로 암묵적으로 자기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고 전하는거 그만둬줄래? 알고 있으니까"
 
"…세세한건 유이가하마가 오고나서 할까"
 
생긋 미소짓는 유키노시타. 그 미소는 도망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담겨있는것 같았다.
 
"…홍차 마실래?"
 
"…응. 받을게"
 
종이컵을 꺼내어 책상에 놓여있떤 하얀 티포트를 들어 홍차를 붓는다.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부어진 홍차는 평온한 따뜻함과, 좋은 향이 나는 증기를 내면서도 내 앞에 내밀어진다.
 
"…나도 조금 걱정했었는데"
 
사라질법한 목소리로 중얼거려진 그 말은 나의 가슴에 꽂힌다. 분노를 보이는것보다 무언가를 체념한듯이 기막혀하는것보다도 분명 다른 어떠한것보다도 그 말은 마음에 와닿는다.
 
"…미안해"
 
그것만 말하고 그 부실에 대화는 사라졌다.
 
 
× × ×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이 부실의 시계는 멈춰있는 모양이라 시간의 경과를 전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는게 없어서 그저 멍하니 있을뿐인 시간이 이어졌다.
유키노시타로 말하자면 방금전까지 읽고 있던 책의 뒷내용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유키노시타가 움찔 반응하고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 책상에 두었다.
그 몇초 후, 교실 문이 기세 좋게 열렸다.
 
"얏하로-! 미안해 유키농. 알바가 오래끌어서 늦어졌어-"
 
열려진 문에서 나타난건 복숭아색이 곁들인 밝은 갈색머리의 여성이었다. 라고할까 유이가하마였다.
 
"아니. 그리 기다린건 아니니까 괜찮아"
 
"이야- 꽤 오랜만이네-……앗, 힛키 있었어?! 엑, 언제 돌아왔어?! 그보다 왜 연락해도 무시한거야?! 그리고 그리고…"
 
"유이가하마. 조금 진정하렴"
 
"아, 미안미안!"
 
크게 심호흡을 세번 한 후에 평소 있던 곳에 의자를 끌어다 자리에 앉는다.
유키노시타의 바로 옆. 거기가 유이가하마 유이의 정위치.
오늘은 그보다도 50센티 정도 유키노시타에게 가까워져있다.
 
오랜만에 봤네-. 이 유루유리.
뭐라고 할까, 어른 여성이 백합백합하는 모습을 보는건 굉장히…좋네요….
 
"자, 그럼 몽땅 자세하게 얘기를 들려주겠니?"
 
유키노시타의 시선이 내 눈동자를 포착하고 떨어지지 않는다.
그 옆의 유이가하마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들의 표정, 이 자리의 분위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망의 여지는 없다.
여기에 온 시점에서 도망칠 생각은 더더욱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마음을 솔직하게 전한다는건 지극히 어렵다.
특히 나, 히키가야 하치만에게 있어서 그건 다른 사람과 비교도 안 될정도로 버겁다는 것이다.
혼자 있는 일이 많았던 나는 마음을 고백한다는 행위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렇게 하는걸로 나 자신을 지켜왔다.
그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다.
필연적으로 이 자리에 있어서도 그 버릇이 나와버리는건 자명의 도리이며, 당연한 귀결이었다.
 
"라고 들어도 뭘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아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게 아니다.
그런 말로 도망치고 싶은게 아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내 입은 완전히 뜻을 반한다.
 
"……정말로 도무지 어찌할 수도 없는 인간이네, 너. 그렇게 얼버무려서 도망치는 점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네"
 
"힛키는 역시 힛키야"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는 기막힌듯한 얼굴로 마주보며 웃는다. 분명 그녀들은 내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키노시타는 '아마 길어진다'라고 말한거겠지.
정말로 여기에 미쳐서까지 미안하다고 마음으로 생각한다.
 
"똑바로 말해서 이제와서 감춰도 소용없단다? 나도, 유이가하마도, 잇시키도, 다들 실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에게. 네 입으로 직접 듣지 않으면 납득이 가지 않아"
 
그 말에는, 평소처럼 설복시키는 차가운 강함이 아닌, 감싸는듯한 따뜻한 상냥함이 있었다.
 
 
 
 
마주보자. 지금 이 때, 이 자리에서.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와.
과거의 사건과.
지금은 더는 만날 수가 없는 그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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