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네 파편 - 추억.
 
 
다음날.
어째선지 평소보다 시원하게 깨워졌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해서, 지금 현재 시계가 정오를 아득히 지나있기 때문이다.
역시 너무 잤군. 이건 어쩌면 잠자는 공주라고 불릴 날이 온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오겠군. 애시당초 난 공주가 아니고.
하지만 뭐, 어제 토츠카는 공주 같았지, 응.
 
졸린 눈을 비비면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는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차가운 물이 나온다. 그걸 손으로 퍼서 얼굴에 끼얹는다.
기후가 조금 더운 탓인지 차가운 물은 적당한 온도를 느끼게 했다.
 
좋아. 눈이 딱 뜨였다.
고개를 드니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탁한 눈을 하고 있군. 꺼림찍함마저 느껴진다, 이거.
밤에 보면 못 자게 될 수준이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충전기에서 뽑아 기동시킨다.
화면에는 '잇시키'라는 표시가 세 건.
하나는 메일이고 남은 둘은 전화다.
 
아아, 그러고보니 어제 연락한다고 말했었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거, 싫은 일은 기억속에서 소거해버리니까.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면서 메일을 표시한다.
거기에는 약속 시간과 장소가 간소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장소를 선택했다는건 분명 그런거겠지.
여기까지 해줬으니 나도 각오를 굳히도록 하자.
 
 
 
 
× × ×
 
 
 
 
목적지에 가까워짐에 따라 걷는 페이스가 서서히 둔해진다. 각오를 굳힌다니 멋진 소리를 한 주제에 이 몸은 타락했다.
우와- 가고 싶지 않아아….
시간에는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집을 나왔으므로 시간 상으로는 괜찮지만 내 마음이 큰 문제다.
여기까지 와서 쫄아버리는 점에서 나는 정말로 치킨인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뼈없는 치킨.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의 유전자네….
 
싫은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낯익은 건물이 보여왔다.
 
나의 목적지인 소부 고교다.
잇시키에 의하면 소부고교의 정문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이다.
여기가 목적지라는 시점에서 아마 잇시키 말고도 누군가 있겠지.
이미 누군가는 설명할것 까지도 없으려나.
 
교문까지 가니 인영이 하나 봉니다.
우선 틀림없이 잇시키겠지. 하지만 잇시키가 집합시간보다 먼저 오는 일은 드물다. 어쩌면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데.
 
아무것도 없는 교정에서 기다리게 하는것도 조금 미안하다.
나는 걷는 속도를 조금만 올렸다.
 
 
"아, 선배 왔네요"
 
"엥, 뭐야, 안 와도 됐던거야?"
 
"아뇨, 그런게 아니고요…. 선배라면 최악의 경우 도망치는것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나의 신용이 너무 없는데, 어떻게 된거야?
…평소 행실이 나쁜거군요, 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망 안 가"
 
"네. 믿고 있었어요"
 
"…그러십니까"
 
몸에 부는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진다.
잇시키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고 순간 망설인 후에 눈꺼풀을 뜬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곧고, 빛나고, 눈부셔서, 나는 직시하지 못해 눈을 피한다.
 
그러자 잇시키는 기막힌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 팔을 안는다.
 
"어, 어이…"
 
"가요, 선배"
 
"갈테니까, 안 도망갈테니까 떨어지지 않겠냐?"
 
"선배는 신용이 가지 않으니까요-♪"
 
아까 하던 말이랑 다르잖아.
나참, 그렇게나 좋은 미소를 짓지마. 떨어질 수 없게 되잖아.
 
 
 
대형 연휴중이라는것도 있어서 학교에는 학생은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있으면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말이지. 거, 부외자가 있으면 눈에 띄고. 거기다 자칫하면 거수자로서 신고당할 가능성까지 있다. 뭐야 그거 슬퍼.
 
정면 현관을 들어가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신는다.
 
 
리놀리움 바닥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린다.
이렇게해서 복도를 걷는것만으로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태반은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의외로 나쁜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옆을 걷고 있던 잇시키가 조금 발걸음을 높여서 내 앞으로 나와, 빙그르 돌아 이쪽을 쳐다봤다.
 
"선배, 어디 가고 싶은곳 있어요?"
 
"아니, 특별히 없다만"
 
"그런가요. 그럼 저를 따라와주세요♪"
 
이 애가 즐거운듯이 이러고 있으면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데 말이지이….
 
 
잇시키는 말하자마자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하하하, 기운찬 녀석이구만-. 너, 나한테는 그런 체력이 없다는걸 알고 있지요?
이 학교, 엘레베이터 설치하는 편이 좋다고 하치만은 생각해.
 
두고가여지는것도 뭐하므로 열심히 잇시키의 뒤를 쫓는다.
 
잠시 쫓아가니 그리운 문 앞에 도착했다.
 
 
"자아 도착이에요! 선배한테 있어선 별로 좋은 추억이 없는 곳인 옥상이에요♪"
 
"어, 어어"
 
왜 처음에 이 장소를 선택한건지는 수수께끼다.
잇시키는 단순히 꺼림찍한 녀석인가아….
 
라고는 해도 새삼 생각할것도 특별히 없다.
2학년 문화제 직후에는 다가가고 싶지도 않은 곳이었지만 지금 되어선 그런건 전혀 아니다.
인간이란 단순한 생물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기억이 애매해져가듯이 그러한 감정도 마음 바닥속으로 잠겨가는 것이다.
 
하지만 잊는다는 것이,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도망치는것이, 나쁘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가 자신에게 직면하는 벽에 우직하게 도망치는건 아니다. 분명 넘을 수 없는 벽도 존재한다. 도망치는것도 좋다. 시간이 지나면 또 그 벽에 맞서면 된다. 되돌아가도 우회해도 좋다. 얼마나 시간이 걸려도 결과적으로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으면 그거면 된다.
 
그러니까 나도, 아마 멀리 돌아와버렸지만, 상당히 시간이 걸려버렸지만.
…한번 더 제대로 마주보자.
 
 
×  ×  ×
 
 
옥상을 뒤로한 후에도 나의 고교 생활에 기억이 있던 곳을 하나 하나 돌았다.
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때마다 그리움과, 쓸쓸함이 가슴을 지배했다.
 
대충 돌아보기를 마치고, 마지막에는 당연하지만 봉사부 부실 앞에 왔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중요하고 소중한 나의 거처였던 부실.
그야말로 나의 고교생활은 여기서 시작해서 여기서 끝났다고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라, 그 정도로까지 이 부실에는 나의 고교생활의 모든것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이 부실에 들어가는건 망설였다.
일찍이 기억을 더럽히는듯한 느낌이 들어버렸으니까.
 
문 앞에서 멈춰서는 나에게 잇시키가 말을 건다.
 
 
"괜찮아요, 선배. …자아, 가요"
 
평소보다도 진지한 음색으로 말하고 잇시키는 문을 열어 내 등을 가볍게 밀었다.
 
 
나는 몇년만에 봉사부 부실에 발을 들여넣었다.
 
 
 
 
"입실할때는 노크를 한다. 그런 상식도 모르게 되버린거니? 히키가야"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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